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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간판

SungHee LEE

2022.06.20 ~ 2022.09.03

작업노트


처음 빈 옥외간판을 마주했을 때의 그 묘한 느낌은 단순히 그 크다란 덩치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어있다는 사실, 정확히 말해 원래의 용도인 광고 메시지를 담는 기능을 멈추고 내 눈앞에 medium 그 자체로서 허옇게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울 따름이었다. 매일같이 지나다니던 강변북로에는 셀 수 없는 광고판들이 자신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서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옥외광고판을 떠바치는 기둥, 광고가 붙여지게 되는 면 등-은 그 치열함 속에서 외려 더욱 더 뒤쪽으로 깊숙이 숨게 된다.

어렸을 때 말을 하다가 문득 어떤 한 단어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런 일들은 사라졌지만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단어를 계속 되뇌곤 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단어는 점점 더 낯설어지던 기억이 있다. 비어있는 간판이라는 모티프에 흥미를 가진 것도 아마 어릴 때의 이상하지만 정의 내릴 수 없었던 그 기억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빈 간판을 마주할 때의 느낌 역시 익숙한 것에서 받은 낯선 느낌이었다. 기호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의-기표(significant/signifié)의 자의적(arbitraire)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기표의 물질성을 통해 어떤 기호를 인지하면서도 우리가 보았고 들었다고 믿는 것은 항상 기의이다.
그렇게 항상 뒤로 물러나 앉아 있는 기표가 전면에 나타나는 순간, 매일매일 사용하던 어떤 단어가 그 뜻과는 상관없이 단어의 소리가 주는 느낌이 앞서는 순간 , 광고가 아닌 광고가 걸리는 매체가 그 자체로 드러나는 순간, 이 순간들이 Empty billboard 연작의 모티프이다. 이러한 순간은 단순히 특이한 개인의 경험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조직하고 있는 구조에 대해 회의하고 새롭게 질문하게 되는 작은 시작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업의 초반에는 구조물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정면으로의 접근을 자주했던 것에 비해 작업이 진행될 수록 간판 주변의 공간과 그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간판과 관계 지어가는 방식으로 작업이 바뀌어갔다. 이 둘간의 관계는 서로 보완하기도 상충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빈 간판의 낯섦이 그 주변으로까지 전이되기도 하지만 주변과의 대비 때문에 빈간판 자체가 더욱 강조되어지는 효과도 가지게 된다.

이 작업에서 나는 빈 간판을 마치 어릴 적 낯설어져 버린 단어를 되찾기 위해 그랬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을 통해 내 작업을 보는 이들이 확실하고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인식의 틀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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